입력:23/12/01수정:24/01/07

반복창

인천투데이 기사 발췌

미두취인소와 관련된 사람으로 ‘미두신’이라 불린 반복창 이야기는 전국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했다. 그는 12살에 미두장에서 명성을 날리던 일본인 아라키의 하인으로 일하다, 2년 후 ‘아라키중매점’에서 미두꾼들에게 인천과 일본 오사카의 미두 시세를 전달하는 일을 하는 요비코가 됐다. 그러다 19살에 중매점의 시장대리인으로 발탁돼 신분이 상승했으나 1919년에 아라키는 부도를 낸 후 일본으로 도망가고, 그 여파로 미두취인소도 3개월 영업정지를 당했다.

다시 미두장이 개장하자 반복창은 자신의 재산 500원 가량으로 미두장에 뛰어든다. 그는 미두 중매점에서 쌓은 노하우로 인해 승승장구하고 큰 수익을 올린다. 단 한 번의 거래로 18만 원 가량의 돈을 벌어들이는 등, 쌀 시세를 정확히 예측해 재산을 40만 원(현시세 약 400억 원)으로 늘렸다.

그는 1921년 신여성으로 미의 여신으로 추앙받을 만큼 명성이 자자했던 ‘원동 큰 재킷’ 김후동과 조선호텔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초호화 결혼식을 올려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요시마쓰 인천부윤이 몸소 축사까지 낭독한 결혼식은 유럽의 왕실 결혼식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호화로웠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에 시세예측이 계속 빗나가 재산을 탕진하고 파산했으며, 1923년에는 사기혐의로 구속되기도 한다. 이후 아내 김후동은 그에게 세 아들을 남기고 이혼했으며, 거듭된 실패와 상실감으로 나이 서른에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다.

결국 정신마저 이상해져 10년 동안 비참한 삶을 살다가 1939년 미두장이 폐지되기 20일 전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호가를 적다가 투자를 시작한 제시 리버모어와 비슷한 인물 심지어 시기도 사망년도도 비슷하다

토픽: - incheon rice exchange,투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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