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3/12/01수정:24/01/05

인천미두취인소

최초의 선물거래 시장은 1710년 오사카 도지마 쌀 시장(堂島米市場)에서 쌀을 기초자산으로 시작한 것이 최초이다. 그리고 이 오사카 시장에서의 가격으로 인천미두취인소 가격은 결정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미두취인소의 고객은 90%가 한국인이었고 이들이 약15년 간 미두장에 바친 돈이 수억 원이었다고 하며, 미두취인소 내부적으로도 파행적인 운영과 오직(汚職) 사건으로 1898년과 1919년 2차례에 걸쳐 해산되고 임원들이 무더기로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한국의 쌀 가격은 정부 통제와 시장원리를 혼합한 방식으로 결정했다. 1960년대 양곡거래소의 필요성이 대두되기도 했지만 미두취인소의 악몽이 매번 발목을 잡았다.

한국에 선물시장이 다시 열린 것은 반세기가 지난 1996년이었다. 코스피200 주가지수를 거래 대상으로 하는 코스피200선물이 상장됐다. 새 선물 시장은 ‘압구정 미꾸라지(윤강로 씨)’ ‘목포 세발낙지(장기철 씨)’ 등 새로운 고수들의 성공담으로 다시 일확천금의 꿈에 불을 붙였다. 빚을 내 선물시장에 뛰어드는 투자자들이 몰리면서 2002년과 2003년엔 한국의 선물·옵션 거래량이 세계 1위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다.

백범 김구의 제자였던 강익하는 미두 거래로 큰돈을 벌어 해방 직후 최초의 민간보험사인 대한생명(한화생명)을 창업했다. 대한제국 말 갑부 조중정의 장남 조준호는 1934년 동아증권을 차리고 오사카 주식시장 시세를 빠르게 전달하며 사세를 불렸고, 광복 후엔 서울 충무로에 사보이호텔을 세웠다. 김귀현은 1936년 일본의 정세 급변을 예측해 대박을 터뜨렸다. 본래 군산 미두취인소에서 재산을 탕진했다가 수개월 만에 20만원을 번 그는 나중에 명치증권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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